[기사] 축구에 입문해서 선수가 되기까지.....
이번 회에서는 독자 분께서 보내주신 질문 중에 우리나라에서 프로축구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질문을 글로 풀어봤습니다. 축구 입문기인 유소년 시절에서부터 어떤 식으로 중, 고, 대학을 거쳐서 프로선수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실제 선수나 가상의 모델을 설정해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지나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을까 합니다. 하재훈의 축구이야기를 쓰기 시작 한지도 이제 90회를 넘어서 100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제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질문에 답으로 하게 됨을 참으로 좋은 기회라 생각하면서 제 축구 인생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 했습니다. 대개가 그렇듯이 어릴 때부터 축구에 대한 관심과 골목축구에 일가견이 있던 저로서는 자진해서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지역마다 유소년 축구클럽이 많이 활성화 되어 피아노 영어 학원 가듯이 자신의 희망과 부모의 권유에 의해서 많은 참가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다니고 있는 학교에 축구부가 있어야만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다니던 마포의 신석 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축구에 대한 갈망과 포부에 의해 축구를 시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월요일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우승 트로피를 받는 축구부원들을 보면서 상당히 부러움과 동경심이 있었고 그런 동경이 제가 축구를 시작하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에서부터 축구를 시작했고 감독선생님의 지도하에 기술적인 습득과정을 체계적으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축구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저글링입니다. 발 등으로 양 발을 번갈아 가며 흔희 말하는 제기차기식의 공을 떨어트리지 않고 얼마나 많이 오래 찰 수 있는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한 발에 두 번을 차도 안 되며 오직 양발을 번갈아 가며 차야지만 인정해 주는 옵션을 달았었습니다. 지금도 축구를 시작하는 선수들에게는 볼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감독선생님은 저희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저글링 횟수 기록을 체크하시며 기록보다 더 많은 저글링에 성공하면 일명 하드(아이스크림)를 사주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많이 찬 기록은 3000번이었습니다. 더 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에서 감독님이 “됐다” 하시며 아이스크림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초기술 습득에 작은 동기부여를 해 주셨던 것 갔습니다. 그렇게 1년간 기본기를 착실히 익히고 5학년 때부터 주전선수로 경기에 나가게 됐습니다.
6학년 때는 팀 주장으로 지금의 화랑대기, 맹호기 대회 그리고 주말에 하는 주말축구에서 우승 한번과 준우승 두 번을 하면서 저학년 때 동경 했던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장을 받는 꿈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한층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축구나 삶의 인생에서 누구든지 언제나 순탄하지만은 않듯이 저에게도 암울했던 시기는 있었습니다. 제가 축구를 하던 학창시절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및 고등학교 진학은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와도 좋다는 스카우트 제의에 의해 특기생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뛰어난 기술과 실력을 인정받아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학교에 가서는 키가 자라지 않아 다른 선수에 비해 파워 면에서 뒤처지게 되니까 제 의지와 마음처럼 축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춘기 시절인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고민도 많았고 좌절도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은 제 키가 177cm지만 중3 졸업할 때 까지만 해도 160c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 기술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아 서울 대신중학교에서 대신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저로서는 참 많은 갈등과 좌절을 했었습니다.
키가 자라지 않아 축구를 관두고 공부를 할 것이냐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안은 한 달간 두 가지를 다 열심히 해보고 내가 가야할 길이 어느 것인지를 판단해보자는 것 이었습니다. 하루에 운동은 새벽, 오전, 오후, 밤 운동까지 4번을 정해놓고 했으며 공부는 시험기간에는 밤을 새워 공부도 해봤습니다. 그 때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기억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잠 안 오게 하는 각성제가 있었습니다. 그 것도 먹어가면서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한계점에 다다라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밤 운동을 하면서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며 가난한 살림살이에 지금까지 저를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 얼굴이 그려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축구며 누구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저였는데 이렇게 관두는 건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 크나큰 한을 남기게 될 것이란 생각에 아무래도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축구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지며 더욱 축구를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거짓말처럼 키가 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그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선배들의 기합과 강도 높은 훈련부하, 질보다 양적인 것에 치우쳤던 그 시절 운동은 열악하고 체계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하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축구 하나 만을 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인내하면서 견뎌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어린나이에 축구를 하면서도 청소 및 선배들의 빨래며 심부름 등은 기본이고 구타도 많았습니다. 배고 고파서 때가 끼고 한쪽 구석에 물기가 새어서 흐르는 양은 세숫대야에 라면 끓여 먹기도 하고 하는 등 참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의식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훈련과 생활습관에 대한 올바른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훈련과 경기 후의 목욕하는 방법까지 선수들에게 이해시키고 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부하는 축구선수라는 교육부의 방침아래 일정기간의 수업일수를 채우게 하며 선수들과 부모님들이 각별히 학업에도 신경 쓰고 있지만, 그 당시 그 시절에는 거의 수업에 참여를 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 했었습니다. 공부에 대한 중요성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훈련에 부하가 많아 다른 것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다고 변명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엔 무척 힘들고 고난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소중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극한 체력적 극치 점에 이르러야 하는 축구를 하는데 있어서 정신적인 강인함을 다질 수 있었던 시절 이었으며, 힘들 때마다 그 때를 생각하며 이겨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축구에 대한 열정과 희망으로 열심히 해서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 시점인 고3 봄, 미리 서울에 모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놓은 상태였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필요한 4강 제도에 의한 특기자 혜택을 받아야 하는데 저의 학교가 전국대회에서 4강에 들지 못했습니다. 지난 호에 쓴 페널티킥이란 코너에서 이야기 했듯이 제가 마지막 키커로 나서 성공하지 못해 결국 지방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방대학에 가서도 개인훈련과 팀 훈련에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대학 첫해에 청소년 대표에 발탁되어 대학 선발팀까지 순탄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막상 성인 A대표에까지는 이르지 못해 지금도 이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학을 보내고 지금의 제주 유나이티드, 1987년 당시 유공(코끼리축구단)에 스카우트 되어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프로축구 입단은 많은 입단 제도에 변화를 거쳐서 드래프트 방식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입단할 때까지는 자유 계약제도였으나 그 다음해 1988년부터는 드래프트하는 팀 성적에 따라 꼴지 팀부터 선수를 지명하는 제도로 바뀌었습니다.
드래프트 제도는 1988년부터 2001년까지 시행하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자유계약제도를 다시 도입해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구단들의 악화된 재정 및 경영 수지를 개선하고 시민구단의 창단을 유도하기 위해 드래프트 제도를 다시 도입 했습니다. 드래프트제란 프로 입단을 지망하는 선수들에 대해 각 구단이 우선순위를 정한 뒤 차례로 지명해 신인 선수를 확보하는 제도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지난 2001년 여러 가지 이유로 폐지되었던 이 제도가 부활한 이유는 구단들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단들의 경영수지 개선에 도움이 되고 신생구단의 선수 확보에 용이해지는 점으로 프로축구 신생팀의 창단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화가 되어있는 축구라는 종목에서 선수들의 직업선택 자유 제한, K리그의 하향평준화, 국내유망주들의 타 리그로의 생활, 유소년 클럽 지원 축소, 대표팀 경쟁력 악화 등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프로에서도 탁월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매년 20경기(시즌의 2/3)정도의 경기에 출전 했었습니다. 프로 첫해 선배들과의 경쟁에서 출전한 첫 경기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출전해서 90분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후반 70분이 지나서 손을 들고 교체해 달라고 하며 “이렇게 열심히 경기를 했더라면 벌써 대표선수 되어 있었을 텐데...”라고 했던 생각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지도자로서 느끼는 것이지만 화려한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성실성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선수로서 지도자인 지금까지 마음속에 새기며 확신하는 것은 “노력하면 반드시 대가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성실성이 부족하나마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습니다. 프로에서 선수로서 94년도 까지 8년, 코칭스텝으로서 2003년까지 스카우터, 트레이너, 코치, 수석코치, 감독대행, 감독에서 성적부진에 책임을 지고 나오기까지 9년, 총 17년간을 프로에 있었습니다. 저는 현재 2004년 독일 유학과 현재 대한축구협회 상근 기술분석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광주 호남대학교 축구학과에 경기 분석학을 가르치는 겸임교수로 강의도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에게 주어진 축구 인생에서 세계화가 되어 있는 축구에서 아직은 시스템적인 사고와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 우리만의 색깔과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한국적 축구전술, 전략에 현장지도자로서의 소임과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저에 대한 축구선수로서 입문 과정과 성장 단계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며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질문에 대한 답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도전을 향해 준비하는 자만이 그 기회를 쟁취할 수 있다는 말처럼 저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지나온 날들의 소중함이 축구를 시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크나큰 기쁨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사람의 축구인으로서 꿈과 희망을 가지시는 분들에게 글을 마치며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개발에 호기심을 유발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창의적인 사고와 구조적인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시스템적 사고를 가진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기술을, 전술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선진 축구. 예를 들어 EPL을 보고 벤치마킹을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눈을 열어준다는 의미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번 회는 ‘hansolz’님께서 보내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재훈 위원이 직접 장문의 글을 정리해주셨습니다.
[하재훈의 축구이야기에서는 여러분의 다양한 질문을 받습니다. 축구에 대한 궁금증이나 알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hong4137@k-leaguei.com 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